고려 2대왕 혜종 왕무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 이후 지방호족세력의 통합 정책으로 29명의 부인에게서 25남 9녀의 자식을 낳습니다. 이 때문에 943년에 왕건이 죽고 난 뒤 자식들의 권력 다툼의 불씨를 남기게 됩니다.
고려 2대 왕은 제 2비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인 왕자 무가 유력했는데 왕건은 다른 호족세력 때문에 쉽게 결정을 하지 못 했습니다
장화왕후 오씨는 당시 호족들 중에서는 힘이 약한 세력이었습니다.
장화왕후 오씨와 왕건의 만남은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있을 때 나주에서 후백제 견훤과 싸웠습니다. 왕건의 주둔한 진영 주변의 산에 오색의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건은 그 구름이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샘가에는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주시오.”라고 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 공손히 바쳤습니다. 왕건이 버들잎을 띄워 준 이유를 물어보니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녀가 장화왕후 오씨입니다.
전라도 나주에서 소금 무역으로 힘을 키운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 오씨는 왕건이 나주를 정벌했을 때 만나 동침을 하였는데 왕건이 장화왕후 오씨가 한미한 가문인 것을 염려하여 임신을 시키지 않으려고 돗자리에 사정을 했는데 오씨가 흡수하여 임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증거로 혜종의 이마에 돗자리 무늬의 흉터가 있다는 것으로 고려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출생담 때문에 “주름살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혜종의 세력이 약해서 반대세력의 창작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이고, 혜종의 왕권이 그만큼 약했다는 증거입니다.
혜종은 2년 4개월간의 재위기간 내 이복동생들의 세력신장으로 이마한번 펴지 못했습니다.
신명순성왕후 유씨는 왕요, 왕소의 어머니이자 왕건의 제 3비입니다. 왕요는 친가와 외가를 합치면 혜종의 지지기반보다 더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혜종은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과 화친을 목적으로 이복동생인 왕소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냅니다. 그러나 그 혼인정책은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혜종의 세력으로는 박술희가 있었는데 박술희는 후고구려의 궁예 때 호위관으로 무관이 됩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고 왕건에게도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최측근으로 왕건을 보필했습니다.
왕건은 혜종을 왕으로 못 세울 것을 알고 장화왕후 오씨에게 낡은 상자에 임금이 입는 붉은색 자황포를 넣어 주었는데 장화왕후 오씨가 박술희에게 상자를 보여 줍니다.
박술희는 왕건의 뜻을 알고 혜종을 태자로 세우도록 신하들 앞에서 건의 하여 혜종이 후계자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왕건이 임종 당시에 훈요10조를 박술희에게 전하고, 혜종의 후견인으로 내세울 정도로 박술희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러나 박술희 역시 정치적 기반과 군사력이 약해서 제대로 혜종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데...
혜종의 또 다른 측근 왕규와 사이가 나빠져서 자신의 주변에 항상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고려 3대왕 정종인 왕요가 이것을 반란으로 누명 씌워서 강화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 뒤에는 정종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혜종 역시 945년 9월에 34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2년 4개월의 짧은 재위 기간과 왕권 약화로
고려를 위한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서 정사에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