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국 이성계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기 신흥 무장으로 전쟁에서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함경도의 변방 함흥 출신인 이성계는 고려시대 지역적 차별로 요직에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전쟁에서 뛰어난 장수이며, 그의 무예도 출중했습니다.
당시 활쏘기는 백발백중으로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몇 안되는 신궁이였습니다.
조선 실록에 기록으로 보면 왕들 중 신궁이 두 명의 왕이 있는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조선 후기 정조(이산)입니다.
이성계는 전쟁에서도 패배를 모르는 장수입니다. 많은 전쟁이 있지만 특히 1380년 황산대첩은 신흥 무인세력 이성계의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됩니다.
고려말기 최영장군과 같이 이성계를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최고의 장수로 등급합니다.
그러나 최영장군은 집안이 좋고 조정에서도 많은 인지도와 백성을 위한 마음으로 고려시대 백성과 조정의 신임을 받지만 이성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성계와 최영은 같은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이 생깁니다.
최영장군은 원나라와의 관계를 중요시 했고, 이성계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요시했습니다.
이성계는 수하의 장수중에 뛰어난 참모가 없어서 더 크게 성장을 하지 못하는데 고려말기 정도전이 자신을 찾아오면서 이성계는 당시 부패했던 고려왕조 몰락시키고 조선을 건국할 모든 준비가 끝이 나게 됩니다.
1388년 명나라와 원나라의 전쟁 중 수세에 몰린 명나라에서 고려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당시 군사적 실권자는 최영이었습니다. 최영은 명나라와 우호적이라 군사를 파병하여 명나라를 돕고자 하면서 이성계를 파병군 사령관으로 임명을 합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자신의 이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전쟁의 공의 최영장군이 가지고 갈 것이고 지게 되면 패장의 책임은 자신이 질거라는 예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꺼져가는 촛불이고 원나라는 신흥강국으로 태어나는데 원나라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게 됩니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가 없다.
2.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모든 군사가 싸우러 나간 사이에 왜구 처들어 오면 막을 수 없다.
4. 여름철 전쟁은 군사가 전염병에 걸리고 활의 아교가 다 녹아서 전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진군을 하다가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장마로 인해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핟건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회군 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지만 바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조정과 백성의 반발이 일어날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사력만 장악을 하고 정치를 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서서히 받게 됩니다.
그 일환으로 1391년 과전법을 시행하면서 조금씩 개혁을 합니다.
당시에는 쌀밥을 이팝이라고 불렸는데 그 뜻은 이성계가 내려준 쌀밥이라고 합니다.
이성계는 이렇게 모든 정치인과 백성의 지지 받으면서도 왕위를 찬탈하지 않고 표면상으로는 공양왕의 양보인 “선양”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태조 이성계는 3번이나 사양을 했지만 계속 내려 주기에 받는다.라고 하면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성계의 성은 “이”씨이고 공양왕은 “왕”씨입니다.
이것을 왕의 성이 바뀐 역성혁명이라고도 합니다.
이때 국호도 “조선”으로 바뀝니다. 옛조선을 뜻을 받든다라고 해서 “조선”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수도를 한양으로 지목이 된 까닭은 북쪽은 북악산, 남쪽은 남사(목멱산),동쪽은 낙산, 서쪽은 인왕산으로 둘려 싸여 방어도시로 적격이였습니다.
그리고 한강이 한양을 지나는데 이 한강은 바다까지 연결이 되면서 세금을 받는 조운에도 유리한 지리적였습니다.